Choice, not chance, determines one’s destiny.
by carflet
하울의 움직이는 성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는 별 재미가 없다. 주관적이고 도발적이고, 일부 하야오 열성 팬들에겐 모욕적으로까지 들리겠지만 그래도 어쩌나. 별 재미가 없었는 걸.

그런데 이 애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의외로 재미 있었던 거다. 빈틈이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라퓨타'나 '모노노케히메'에 비하면 이 영화는 굉장히 어설퍼 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토토로'처럼 귀엽지도, '센과치히로'처럼 잘 짜여져 있지도 않고, 기본적으로 엉성한 플롯에다가 고집스럽게 던지는 반전 메세지 또한 패착에 가깝다. 그러나 이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애니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 들어있으며 그 힘은 기존의 어떤 애니보다 강력했다.

화면을 가득채운 부드럽고 맑은 유토피아적 풍경이나 계속해서 귀를 사로잡는 효과음, 낭만적인 음악, 그리고 글자 그대로 주인공의 '꿈 같은' 스토리는 지브리가 드디어 '만화영화'의 미덕을 제대로 살려낸 애니를 내놓았다는 생각이 들게 만든다. 디테일을 다 무시하더라도 만화영화는 역시 판타지를 착실히 구현해낼 때 매력적이다.

바람처럼 떠돌고 싶어하는 미소년 하울, 하울에게 동경과 모성을 동시에 느끼면서 변신하는 소피, 질투와 고집이 가득한 황야의 마녀나 키다리아저씨와 개구리왕자를 섞어놓은 듯한 허수아비 등은 모두가 서로에게 꿈이고 판타지이다. 그래서 허수아비가 이웃나라 왕자가 되어버릴 수도 있고, 엉뚱하게 전쟁이 멈추어버리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이상한 헤피엔딩으로 끝나버릴 수도 있지만, 그런들 어떠한가. 소녀의 판타지는 소피의 모습만큼이나 계속 달라지기 마련인걸.

하울이 소피와 함께 하늘을 산책하는 장면, 왈츠와 함께 흐르던 그 순간이 비단 여성 관객에게만 감동의 판타지로 그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전원 풍경이나, 죽기전 한번쯤 그런 곳에서 살아봤으면 싶은 항구마을이나, 모두들 가슴 한견에 품어 보았을 소중한 판타지 아니던가. 하야오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건 그 때문이다.

(아래는 S의 글에 덧글로 써놓았던 내용)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그렇게 슬프게 느껴졌다는 거- 혹시 네가 지금 너무 무거운 짐을 지고 살려 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울의 어두운 면에만 너무 감정이입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봐 친구, 그러니 그 불필요하게 무거운 짐은 좀 내려 놓고 청춘의 꿈과 아름다움을 충분히 즐기는게 어때? - 나한테는 오히려 이게 영화의 주제로 들리더라 이거지.

기존의 하야오 작품들, 그러니까 붉은 돼지나 모노노케 히메 등을 보면 주인공이 온 세상 아픔-그것도 잘 해결되기도 힘든 근본적인 아픔-을 짊어지고 살아가잖아.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숨어버리기도 하고. 내가 하야오 애니들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중 하나도 그런 무거움이 아니었나 싶은데 '센과 치히로'를 지나 '하울'에 이르러서는 주제가 많이 달라졌다는 게 느껴져.

내 홈피에도 짧게 평을 남겨 놓긴 했지만,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삶의 아픔과 무게보다는 아름다운 판타지를 보여주는 데 중심을 두었다고 봐. 사는 게 평범하다 못해 재미 없고, 자기가 예쁘다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실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예쁜데도- 그런 할머니 같은 소녀에게 멋진 판타지를 보여주는 거지.

아마 하울을 만나지 않았다면 소피는 계속 그렇게 소심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스무살도 안된 꼬마가 별 꿈도 없고, 청춘을 즐기지도 않으면서 무미건조하게 산다면 얼마나 비극적이야. 하울이 혼자 군대랑 싸우는 것보다 그게 훨씬 슬프잖아. 그러던 여자애가 멋진 남자를 만나서 하늘에서 산책도 해 보고, 그림같은 경치의 시골집에도 가보고, 또 혹시 알아? 나중엔 이웃나라 왕자랑도 연애하게 될지? 허수아비가 남긴 말이 조크가 아니고 소녀의 판타지란 그래야 정상이지. 허무맹랑하고 현실감이 없다 해도 그런 꿈을 꿀 수 있다는 자체가 행복한 거고.

다만 하울이 군대와 맞서 싸우는 장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더라. 왜 굳이 그런 상황을 넣었는지. 그게 하야오 작품에서 자주 나왔던 반전 메시지의 반복이었다면 여기서만큼은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거든. 극 전체의 흐름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아서. 만약 그게 아니고 앞서 얘기했던 아름다운 판타지를 더 강조하기 위해서 무의미하고 추악한 전쟁에 대비시킨거라면 이해할만한 여지가 있지만, 그래도 깔끔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네. 탐미주의자에 바람둥이인 하울이 그런데 뛰어드는게 좀 이상하잖아. 혹시 그게 하울 자신의 판타지였던 걸까. 고독한 아웃사이더의 로망 같은거.

어쨌든 초반에 나오는 공중 산책 장면은 정말 압권이야. 남자인 나조차도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였으니까. 영화 보는 2시간 동안 즐거운 꿈 속에서 놀다 왔다는 것만으로도 하울은 충분히 만족스러웠고, 예순을 넘긴 할아버지가 이런 장면을 연출해 낸 걸 보면 다음 작품에선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 안 할 수가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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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orfati | 2005/01/07 00:55 | Kinopia in (영화) | 트랙백 | 덧글(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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